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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강한 가게 ①

간판도 없이 세계가 줄을 서는 향수 가게

뉴욕 놀리타의 작은 향수 가게 르라보는 광고 한 번, 투자 한 푼 없이 컬트 브랜드가 됐습니다. 비결은 마케팅이 아니라 창업자들이 붙든 단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르라보 (Le Labo)6분 분량
간판도 없이 세계가 줄을 서는 향수 가게
© Le Labo

뉴욕 놀리타의 좁은 골목, 233 엘리자베스 스트리트. 요란한 간판 하나 없는 이 작은 향수 가게가 광고 한 번, 투자 한 푼 없이 전 세계 사람들이 줄을 서는 컬트 브랜드가 됐습니다. 이름은 르라보입니다.

비결이 화려한 마케팅이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르라보를 브랜드로 만든 건 창업자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붙든 단 하나의 가치였습니다. 오늘은 그 가치가 어떻게 간판과 공간, 이름, 응대까지 하나로 꿰뚫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질려서 회사를 나온 두 사람

2006년, 조르지오 아르마니에서 일하던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파브리스 페노와 에두아르 로쉬입니다. 두 사람은 향수 업계에 질려 있었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고, 알맹이보다 이미지로 파는 향수들이 넘쳐났기 때문이죠.

결국 둘은 회사를 나와 놀리타의 작은 가게 한 칸을 얻습니다. 화려한 자본도, 대단한 계획도 없었습니다. 대신 분명한 불만이 있었고, 그 불만이 브랜드의 출발점이 됩니다.

뉴욕 놀리타의 르라보 매장 외관
뉴욕 놀리타에서 시작된 첫 매장.© Nolita, NYC

슬로우 퍼퓨머리라는 씨앗

그들이 심은 씨앗은 '슬로우 퍼퓨머리'였습니다. 빠르게 많이 만드는 게 아니라, 느리게 손으로 진짜 재료를 써서 만들자는 것이었죠. 원료는 직접 고른 천연 재료만 썼고, 동물실험도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향수는 손님이 사는 그 순간, 매장에서 즉석으로 조향해 드립니다. 미리 만들어 쌓아두고 파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만들어 건네는 것이죠. 이 하나의 가치가 이후 브랜드의 모든 것을 결정합니다.

르라보에서 향을 조향하는 모습
사는 순간 매장에서 즉석으로 조향합니다.© Le Labo

가치가 정하면, 디자인은 따라온다

가치가 정해지니 디자인이 저절로 따라옵니다. 매장은 향수 부티크가 아니라 '실험실'처럼 꾸몄습니다. 화학을 전공한 로쉬의 색깔이 그대로 담긴 거죠. 검은 철제 선반과 낡은 빈티지 가구, 일부러 벗겨낸 벽까지. 완벽하게 다듬기보다 자연 그대로 두는, 와비사비의 미학입니다.

실험실처럼 꾸민 르라보 매장 내부
부티크가 아니라 실험실. 가치가 공간의 결을 정했습니다.© Le Labo

이름조차 꾸미지 않다

이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르라보의 향수 이름은 그냥 숫자입니다. 산탈 33, 로즈 31. 조향에 들어간 원료의 가짓수를 그대로 붙인 겁니다. 근사한 스토리로 포장하는 대신, '우리는 이미지로 팔지 않겠다'는 조용한 선언을 이름에 담은 셈이죠.

숫자로만 표기된 르라보 향수
산탈 33, 로즈 31. 이름은 조향 코드 그 자체입니다.© Le Labo

포장도 소박한 갈색 상자 하나입니다. 그리고 라벨엔 손님의 이름과 그 도시, 그리고 오늘 날짜를 손으로 찍어 줍니다. 똑같은 공식으로 만든 향수가, 그 순간 세상에 하나뿐인 물건이 되는 것이죠.

손님의 이름과 날짜가 찍힌 르라보 라벨
라벨에 손님의 이름과 도시, 날짜를 새겨 줍니다.© Le Labo

광고 대신, 도시를 팔다

운영 기준도 가치에서 나옵니다. 르라보는 광고를 하지 않습니다. 대신 도시마다, 그 도시에서만 파는 '시티 익스클루시브' 향수를 만듭니다. 뉴욕엔 뉴욕의 향, 교토엔 교토의 향이 따로 있는 식이죠. 매장 건축마저 그 도시의 결을 담아 매번 다르게 짓습니다.

그래서 손님은 상품을 사는 게 아니라, 그곳에서만 겪을 수 있는 경험을 사게 됩니다. 광고로 부풀린 이미지가 아니라, 직접 찾아가야만 얻는 경험이 곧 마케팅이 된 것이죠.

그 도시의 결을 담은 르라보 교토 매장
도시마다 다른 향과 공간. 교토에는 교토의 르라보가 있습니다.© Le Labo Kyoto / Schemata Architects

그래서 어떻게 됐나

광고도 투자도 없던 한 칸짜리 가게는, 입소문만으로 전 세계 50개가 넘는 매장이 됩니다. 산탈 33은 뉴욕을 상징하는 향이 됐고요. 2014년엔 대기업 에스티로더가 르라보를 인수합니다.

보통 대기업에 팔리면 브랜드의 소울이 사라지곤 하죠. 그런데 르라보는 창업자들이 그대로 남아 향을 만들고, 그 가치를 지켜냈습니다. 그렇게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도, 사람들은 이 작은 랩 앞에 줄을 섭니다.

르라보 매장의 간판
요란하지 않은 간판. 그러나 그 안에는 일관된 가치가 있습니다.© Le Labo

브랜딩은 간판이 아니라, 가치에서

창업을 앞두고 있다면 여기서 챙길 게 있습니다. 르라보는 간판을 예쁘게 만들어서 성공한 게 아닙니다. 먼저 '어떤 가치로 장사할 것인가'를 정했고, 그 가치가 간판과 인테리어, 이름, 포장, 손님 응대까지 하나로 꿰뚫었기 때문에 브랜드가 된 겁니다.

브랜딩은 간판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가치에서 시작됩니다.

여러분의 가게는 어떤 가치를 씨앗으로 삼고 있나요? 그리고 그 가치가 간판 하나까지 일관되게 뻗어 있나요? 그 가치를 간판과 외관, 공간으로 설계하는 일을 간판다는날이 함께하겠습니다.

간판다는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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